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눈이 내린다는 곳, 세상에서 눈 치우는 기술이 제일 발달되어 있어 북유럽등지에서도 기술을 배워 간다는 곳, 복지국가답게 아무리 눈이 몇 십 센티미터가 내려도 아스팔트를 뽀송뽀송하게 만드는 곳.
이곳은 12월 말 정도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눈이 보통 2월까지 많이 내린다. 한번 눈이 내리면 이틀, 사흘 하염없이 내려 마치 카드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법한 아름다운 진풍경이 일어나고 있다. 기온이 낮아져 잘 녹아 없어지지도 않는 눈은 공해에 저촉되지 않아 그냥 입에 털어 넣어도 괜찮을 정도로 깨끗하다. 어릴 때 부르던 동요의 가사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는 백설의 낙원이다.
특히 내가 사는 동네는 겨울이 되면 휴일에 차댈 곳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집 앞의 산책로는 크로스컨트리 장으로 변신을 하고, 한여름 밤에 오페라 공연을 하던 공원의 비탈은 커다란 눈썰매장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멀리 스키장을 찾아갈 필요도 없다, 내 아이들이 어릴 때 데리고 가던 자연농원의 커다란 눈썰매장 같은 것이 코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진풍경속에 어른들만의 고민거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집 앞의 눈을 치우는 일과 출근길에 차고의 차가 나올 수 있게 눈을 치우는 일이다. 얼마 전 영동지방 많이 내린 눈으로 강원도 일대의 도로가 고립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눈은 이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눈이다. 온 세상을 흰눈 속에 묻어 버릴 것 같은 기세로 집 앞의 눈을 치우고 돌아서면 또 쌓여 자주 치운 집이나 치우지 않은 집이나 다를 것 없이 만들어 준다.
하지만 주택가하고는 달리 공용도로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마치 눈이 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크고 작은 눈차들이 일제히 도로에 나타난다. 인도는 인도의 사이즈에 맞는 귀여운 작은 눈차가, 차도는 차도대로 바퀴하나가 지붕높이 만한 지름을 가지고 있어 옆에만 가까이 가도 치일 것 같은 차들이 도로를 점유하고, 고속도로에는 그런 차들이 대여섯 대가 대각선으로 줄지어 달리며 아스팔트의 눈들을 옆으로 밀어내면 뒤이어 큰 덤프트럭들이 나타나 계속해서 눈들을 거둬 싣고 싹쓸이를 해 간다. 그러니 아무리 눈이 내려도 아스팔트는 말라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온지는 사년이 된다. 내 집이 있는 길에는 열가구 주택이 모여 있다. 동양인은 우리가족하나이고 모두가 이곳 현지인들이다. 집 앞에 멋진 공원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곳으로 이사 온 후 해가 지날수록 옆집에 사는 이웃집 아저씨가 고맙기 그지없다.
이사 온 첫해 겨울.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밤에 늦게 귀가하는 날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니 동네 아저씨들이 몇몇 나와 있는 게 아닌가.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동네에 무슨 일이 났나 싶었다. 의아해 하면서도 차고로 진입하려는데 옆집 아저씨가 손짓을 하며 차를 세우더니 내가 너희 집 차고 앞을 치우고 있으니까 다 치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눈이 밤새 쌓이면 내일 아침에 출근에 지장을 받을까봐 옆집 아저씨가 주동이 되어 귀가하지 않은 집들까지도 다 치워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는 처음 겪는 일이라 어찌 이런 일이 있나 싶어서 카메라를 들고 나와 신기함을 담아두기도 했었다. 내 집 치우기도 귀찮아 죽겠는데 남의 집의 산더미 같이 쌓인 눈까지 다 치우다니. 하지만 그러기를 지금까지 4년 내내 하고 있는 옆집 아저씨. 자기 집이 아닌 다른 집의 집안에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그 집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치우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온 동네 눈을 다 치우고 있다. 처음에는 그분이 실업자든지 아님 은퇴자라서 시간이 많으신가보다 하였는데 알고 보니 큰 기업체 사장님이시란다. 어유, 이쁜 우리 옆집 아저씨!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젠 옆집 아저씨 덕에 아무리 눈이 와도 슬쩍 걱정이 안 될 때도 있는 게 솔직한 마음인 걸 어쩌겠나.
또 며칠 전, 아침에 그 아저씨의 부인인 옆집 아줌마와 동시에 차고에서 차를 빼며 눈인사를 나누고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그 옆집 아줌마의 차는 이곳에서도 값이 비싸 아무나 타기 힘든 빨간색의 멋진 차다. 가을에 새로 사서 시간만 나면 집 앞에 세워 놓고 세차를 하곤 했던 차로 내가 봐도 빨간색이 얼마나 예쁜지 나도 더 나이를 먹으면 저 색깔을 타봐야겠다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삼 분 후 앞집아줌마의 차 뒤를 따르던 내가 신호등이 나타나기에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차가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아차 녹았던 눈이 밤새 기온이 떨어지면서 온도로가 빙판이 되어 있는 걸 우습게 알았구나.’ 하는 생각과 후회는 이미 늦어 벌써 난 앞차에 부딪치곤 말았다.
그 후 뒤 따라 오던 차들도 무슨 첩보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줄줄이 와서 들이박고 반대편에서 수습하러 오던 경찰차들도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 시간대쯤 기온이 갑자기 급강하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그런 상황은 염두에 없이 내가 들이박은 차가 하필 옆집 아줌마의 새 차란 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잘 안 되는 불어로 손짓 발짓 하며 미안하다를 연발 하고 일단 퇴근 후 저녁때 집에서 다시 이야기 하자며 헤어졌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도로 사정이야 어쨌든 남의 새로 산 차를 박다니. 그것도 비싼 차를.
미안함에 하루 종일 불편한 맘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옆집 아저씨가 사고 경유서 서류에 사인하라며 현관에 들어섰다. 아저씨의 손에 들린 서류를 보는 순간 미안함에 앞서 속이 상했지만 “어휴 할 수 없지 뭐. 비싼 차를 파손시켰으니 보험 수가가 엄청 올라가겠는 걸.” 체념하며 기가 죽어 사인을 하려는데 어디서 천사의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걱정 마세요, 암만 생각해도 오늘 아침의 사건은 아무리 도로가 얼었다 하더라도 시에서 도로의 수평을 잘못 설계해서 차들이 미끄러진 것 같아 시에 들어가 항의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시에서 연락이 오기를 도로 설계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어 운전자 아무에게도 잘못이 없으니 보험하고도 상관없이 시에서 알아서 배상한다 하였으니 걱정 말고 사인하십시오. 돈 워리!”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분명히 남의 차를 망가뜨린 게 확실한데. 내 차를 박아 억울해서 진정한 것도 아니고, 자기 차를 파손시킨 이웃이 걱정할까봐 시에까지 가서 이웃의 입장을 대변한 사람.
겨울이면 눈 속에 묻혀 이웃집 눈을 다 치워 주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또 사람을 감동시키다니요. 사랑해요 옆집 아저씨! 당신이 있어 행복한 이웃입니다. 저도 앞으로 그런 일 생기면 당신처럼 좋은 일 많이 하겠습니다.
남기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한국음식전문점 '아띠'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국의 땅에서 만나는 문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