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의 인기 패널이었던 핀란드 출신 따루 살미넨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외국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인만큼이나 자유자재로 생활언어를 구사하고, 즐겨 먹는 음식으로 막걸리와 홍어회를 꼽는 파란 눈의 그녀가 이제는 한국 막걸리를 파는 주막의 어엿한 주모가 됐다.
“주방에서는 오늘 시메사바(고등어초절임)가 신선하다고 하네요. 유황오리와 숙주볶음도 인기 메뉴고요.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홍익대학교 앞 서교초등학교 근처에는 저녁마다 정겨운 이야기가 오가는 주막이 있다. 핀란드 국기가 반기는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정통 일식을 전공한 셰프가 요리를 준비하는 오픈 주방이 나오고, 투박한 막걸리 잔을 부딪치는 사람들 틈으로 인심 넉넉한 주모의 모습이 분주하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핀란드·일본·한국 등 각국의 문화가 뒤섞인 이곳은 깔끔하면서도 편안하게 꾸며놓았지만 옛 시골 장터에서 접할 수 있을 법한 주막 특유의 취흥이 가득 차 있다.
문을 연 지 이제 넉 달째 접어드는 이 주막은 평소 ‘막걸리 예찬론’을 펼치며 막걸리 사랑을 실천해온 따루 살미넨(34)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막걸리를 나누고 즐기고자 마련한 곳이다. 한국에 온 뒤 우연히 맛본 막걸리의 매력에 빠져 ‘막걸리 학교’에서 전문적인 공부까지 마친 그녀는 오랜 기간 꿈꾸고 준비한 끝에 드디어 ‘막걸리 사랑방’의 안주인이 됐다.
“막걸리 가게를 내고 싶다는 생각은 3, 4년 전부터 품고 있었어요.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적성에 잘 맞는 일을 찾고 싶었는데, 제가 워낙 막걸리도 좋아하고 사람들과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즐기는 편이라 가게를 열어봐도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다 지난해 초 한 방송에서 한 해 소망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막걸리 주막을 열고 싶다’고 공언했거든요. 그 방송을 보고 투자하고 싶다고 연락 주신 분도 계세요. 같이하진 못했지만 그때부터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죠.”
가게를 내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절차를 밟고,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들을 점검하고, 메뉴를 선정하고, 공사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이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인 만큼 준비 기간 내내 신바람이 났단다. 기억하기 쉽고 친근한 이름을 고민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따루 주막’이라는 간판도 내걸었다. 피곤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잠도 자고, 속에 쌓였던 응어리도 풀어낼 수 있는 훈훈한 옛 ‘주막’ 같은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맛있고 건강한 술, 막걸리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따루 주막’에는 경계가 없다. ‘주막’을 표방하지만 막걸리뿐 아니라 한국, 일본, 핀란드의 대표 술과 안주를 맛볼 수 있다. 테이블 위에는 시원한 막걸리, 정겨운 사케, 깔끔한 보드카가 놓여 있고, 공기 중에는 각각의 고유한 느낌들이 뒤섞여 있다. 소품이며 가게 분위기도 글로벌하다. 각국의 술과 안주, 문화는 언뜻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의외로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원래 막걸리와 청주·사케는 형제인 셈이에요. 큰 통에 술을 빚을 때 윗부분의 맑은 술은 청주가, 아래로 가라앉은 술은 막걸리가 되잖아요. 손님들이 막걸리를 드시다 배부르다고 하시면 청주를 권해드려요. 또 핀란드 사람으로서 한국 분들께 핀란드 보드카의 맛도 소개하고 싶었어요. 막걸리야 제가 워낙 사랑하는 술이니까 다양하게 준비했고요.”
여기에 한식·양식·일식에 모두 일가견이 있는 셰프의 손맛이 더해져 술맛을 돋운다. 그녀와 함께 주막을 꾸려나가는 김성훈 셰프는 정통 일식을 전공하고 10년 넘게 활동해 온 베테랑 요리사로 막걸리와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요리들을 척척 만들어낸다. 고정된 메뉴도 있지만, 그날그날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들어낸 셰프의 추천 안주가 인기 있는 편이다. ‘따루 어머니표’ 비법이 숨어 있는 핀란드식 연어샐러드도 맛이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돋보이는 건 ‘막걸리 학교’ 우등 졸업생 따루가 자신 있게 엄선한 막걸리의 기막힌 맛이다.
“우선 지금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막걸리들을 골라 판매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서울 막걸리밖에 몰랐는데 지역별로 맛과 향이 다 다르더라고요. 부산이며 고창이며 여행을 다니면서 지역별로 유명한 막걸리를 섭렵했어요. 제대로 알고 즐기고 싶기도 하고 가게를 열면 손님들께 전문적인 정보를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전통주 전문가가 운영하는 막걸리 학교를 다녔어요. 막걸리의 역사, 빚는 방법, 막걸리 응용법, 술 예절 등 이론과 실기를 두루 익히고 막걸리를 직접 빚어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막걸리는 맛있잖아요. 종류별로 달콤하면서도 시큼하고, 담백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나요. 와인만큼 다양한 맛을 갖고 있어서 웬만한 음식과도 다 잘 어울리고요. 술이긴 하지만 단백질,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유산균이 많아 건강에도 좋고요. 간혹 막걸리를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빨리 숙성시키려고 첨가물을 넣어 만드는 예전에나 그랬고, 제대로 만들어내면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발효과정에서 더 부드럽고 깔끔해지죠. 막걸리만큼 뒤끝 없고 건강한 술도 없을 거예요.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는 술이에요.”
핀란드에 2호점을 내는 그날까지 ‘따루 주막’이 문을 연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특별한 맛에 반한 단골손님도 꽤 많이 생겼다. 함께 방송에 출연했던 친구들도 여럿 다녀갔고, 프로그램을 통해 따루와 인연을 맺은 개그맨 남희석은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꼴로 주막을 찾아올 정도로 반해버렸다고. 또,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꽤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한 손님은 경주에 사시는 분인데 서울에 일이 있어서 오셨다가 꼭 와보고 싶던 곳이라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하시는 거예요. 감사해서 서비스 안주를 많이 드렸죠(웃음). 그런데 그때 제가 ‘경주빵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시고 그 후에 가게로 경주빵까지 보내주셨어요. 단골손님 중에 점점 친해져서 집에도 놀러가고, 좋은 언니 동생 사이로 의지하며 지내게 된 분들도 생겼어요. 사실 사람들 사이에 편안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러고 보면 술이 좋은 가교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막걸리도 실컷 마시고 따뜻한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해요. 다만, 최근 부쩍 높아진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금세 시들해져버릴까 걱정이 돼요. 한국은 유행이 빨리 바뀌는 편이잖아요. 좀 더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또 많은 사람들이 막걸리를 맛있게 즐겼으면 해요. 막걸리는 외국인들도 좋아할 만한 장점이 많아요. 한국의 문화를 담은 진짜 ‘한국적 막걸리’가 세계로 널리 뻗어 나갔으면 좋겠네요.”
그런 점에서 따루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언젠가는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고향 핀란드 헬싱키에 ‘따루 주막’ 지점을 내는 것. 상상만 해도 즐거운 그 순간을 위해서 막걸리는 물론 한국 전통주와 음식 문화에 대해 앞으로 더 열심히 배워 나갈 생각이란다. 이 파란 눈의 주모의 목표가 이루어지길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며, 오늘 저녁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을 들이켜보는 건 어떨까.
‘따루 주모’가 소개하는 막걸리 맛있게 즐기기 한국에는 각기 맛과 향이 다른 수백 종류의 막걸리가 있어요. 지역에 따라, 재료에 따라, 발효법에 따라, 숙성 기간에 따라 느껴지는 맛과 향이 다른데요. 사람마다 선호하는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특성을 알고 취향대로 골라 즐기면 돼요. 대체로 평소 막걸리를 자주 접하는 분들은 좀 ‘텁텁한’ 맛을, 그렇지 않은 분들은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더라고요.
(1)경상도 지역 막걸리는 소위 말하는 ‘옛날 맛’이 많이 나요. 밀로 빚었기 때문에 달지 않고 살짝 텁텁하게 느껴지죠. 남자 분들이 특히 많이 찾으시고, 달지 않아서인지 무한대로 많이 마실 수 있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맛이에요. 처음에는 좀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계속 마시다 보면 경상도 막걸리를 찾게 되더라고요. 막걸리의 ‘참맛’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죠.
(2)전라도 지역 막걸리는 약간 달달한 맛이 나면서도 묘한 감칠맛이 도는 매력이 있어요. 목 넘김이 부드럽지만 조금 시큼하기도 하죠. 이틀 정도 숙성시켰다 마시면 더욱 맛있는데, 요구르트 같은 맛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따루 주막’을 처음 찾아온 분들께는 주로 전라도 지역 막걸리로 시작하라고 권하는 편이에요.
(3)요즘 부쩍 검은콩 생막걸리의 인기가 높아졌어요. 이 막걸리는 맛이 미숫가루 같기도 하고 두유 같기도 해요. 고소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서 많이들 찾는 것 같아요. 검은콩 생막걸리는 가게에 막 들어온 것은 절대로 바로 팔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3일 정도 둬서 숙성이 이루어진 뒤에 마셔야 가장 맛있기 때문이죠.
(4)경북 대구 지역 팔공산 생막걸리는 주로 밀로 빚는 다른 경상도 막걸리와 달리 쌀로 만들어요. 눈으로 보기에도 색이 아주 곱고 하얗죠. 뽀얀 색깔만큼 맑고 상쾌한 느낌의 맛을 내요.
(5)복순도가 생막걸리는 ‘미녀들의 수다’에 같이 출연했던 친구의 아는 분이 100% 전통 방식으로 막걸리를 빚으신다기에 맛을 보러 찾아갔다가 완전히 반해버려 판매하고 있어요. 옛 항아리 독을 사용해서 친환경 햅쌀로 빚고, 누룩은 전통 밀을 쓰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 수가 없대요. 아껴 마셔야 하는 막걸리인데요, 톡 쏘는 청량감이 살아 있어서 아주 맛있어요.
(6)저희 주막에서 다른 막걸리는 전부 큰 잔에 따라 마시는데, 자색고구마막걸리만큼은 작은 잔을 사용해요. 다른 막걸리에 비해 도수가 조금 높거든요. 색깔도 예쁘고 맛있어서 젊은 손님들이 선호하는 막걸리예요. 회나 해산물 같은 안주와도 아주 잘 어울리죠.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강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