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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남자의 오기, 한류(韓流)를 창조하다

hallyuforum | 2014.10.08 14:33 | 조회 417
조회 : 647  

베이비 복스' '라니아' 만든 DR뮤직 윤등룡 대표

●그는 왜 또 한번 걸그룹을 만들었을까?
●한류 개척의 선봉장 윤등룡 대표의 케이팝 진단


'한류의 전도사'로 통하는 윤등룡 DR뮤직 대표. 그는 일찍부터 한국 가요시장의 활로는 해외진출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아시아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로 통한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축구 국가대표를 꿈꾸던 사나이가 있었다. 왼쪽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다는 것은 운동을 택한 한 청춘의 궁극의 이상이었다. 1978년 그는 청소년상비군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등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인천대 2학년 재학시절 불의의 사고가 찾아왔다. 왼쪽다리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오로지 태극마크를 위해 달려온 한 청춘은 깊은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오똑이처럼 일어섰다.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면서 가수 최백호를 우연히 알게 돼 음악에 빠진 것이다. 도전 정신과 친화력 만큼은 누구에도 뒤질 게 없던 그는 1989년부터 본격적인 음반제작자로 문화사업에 뛰어들었다. '11월' '빛과 소금' '스트레인저' 등 당시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1996년 깜짝놀랄만한 반전을 이끌어 낸다. 미모와 댄스실력을 갖춘 여성5인조 그룹 '베이비 복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순식간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 여성그룹은 SES와 핑클과 함께 199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걸그룹이자, 한류(한류)를 처음으로 개척한 가수로 기록됐다.

윤등룡(52) DR뮤직 대표의 대략적인 사업의 전반기 이력이다. 그는 대략 '베이비복스'를 만든 기획사 대표로 널리 알려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현재 아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케이팝(K-pop) 붐의 설계자로 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이다. 실제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한류로드'가 만들어 진 셈이다.
최근 그는 7인조 여성 댄스그룹 '라니아'를 만들고 다시 새롭게 재기를 모색중이다. 그를 만나 한류 개척 초기 시장과 최근 케이팝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라운드 축구 전사에서 문화 수출 전사로

윤등룡 DR뮤직 대표는 1990년대 말부터 자신이 키운 <베이비복스>를 앞세워 케이팝의 해외 진출을 주도해왔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윤 대표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무척이나 바빴다. 최근 라니아를 위해 방한한 '테디 라일리'(미국 음악 프로듀서) 때문이기도 했고 라니아 해외투어 확정을 짓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7월에 있을 KBS뮤직뱅크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바로 태국으로 건너가 9개 나라를 돌아다닐 예정이다."

-최근 케이팝 붐이 불면서 다시 윤 대표도 재조명 받고 있다. 최근에는 태국통(通)으로만 알려졌는데 사실 활동 범위는 아시아 전역이었는데….

"물론이다. 제가 바로 가장 먼저 아시아 지역을 공략해 터를 닦은 장본인인데…, 당시 한류에 대해 두가지 확장 경로를 구상하고 있었다. 먼저 중국을 축으로 대만 홍콩 몽골 등 중화권이 있고 이를 타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로 건너가는 '북방길'이 있다. 두 번째 길이 바로 태국 방콕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시아다. 이 곳을 축으로 중동을 거쳐 인도로 들어가는 '남방길'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이 워낙 크니 중국에만 매달렸는데, 내 생각은 문화란 싸이클이 있기 때문에 이왕이면 여러 나라를 동시에 공략해야 거품이 가라앉더라도 순환 주기를 갖고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봤다. 결국은 내 예상대로 한류가 확산이 된 셈이다."

-어째서 한국의 음반 제작사들은 해외진출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나?

"구조적인 문제라고 본다. 한국이란 나라가 너무 작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 구조가 수출용이 아니던가? 문화산업도 마찬가지다. 밖으로 나가야만 1500여개나 되는 프로덕션이 살길을 모색할 수가 있다. 게다가 경쟁력도 있다. 전 세계 그 어느 나라 연습생도 우리나라의 연습량과 끼를 따라가지 못한다. 충분히 통한다고 봤으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사실 2005년까지만 해도 DR뮤직의 베이비복스가 해외에서 그렇게 인기 있는지 몰랐다. 이제 와서 뒤돌아보니 베이비복스가 큰일을 해 낸 것 같다는 평가인데…

"허허…1999년 12월을 잊을 수가 없다. 중국 CCTV에서 첫 방송을 가진 시점인데, 당시 섹시하고 세련된 여성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며 중국에서 난리가 났다. 그 때부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베이비복스가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어떤 의도에서 해외에서 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

"이 팀은 1996년에 기획해 1997년에 국내 무대에 출시됐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가요와 미국의 팝이 수준이 차이가 존재할 때였다. 또한 국내 가요는 일본팝(J-pop)을 공공연하게 카피해 수익을 올리던 시점이다. 당시 SES와 핑클 역시도 일본 팝을 벤치마킹한 결과였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결국 케이팝이 미국 팝과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하게 미국으로 진출해야 시장이 넓어진다고 본거다. 그래서 당시 트렌드와는 확연하게 다른 아이들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이비복스로 국내보다 해외에서 히트 

2000년대 초반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큰 인기를 얻은 걸그룹 <베이비복스>. 윤등룡 DR뮤직 대표는 "당시 아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서구적 스타일로 케이팝의 모범을 창출한 사례"라고 회고한다.(동아일보 DB)


-베이비복스는 키도 좀 컸고 파워풀 했다는 느낌이 든다.

"맞다. 우리는 보이시 파고 파워풀한 여성그룹을 만들고 싶었다. 탈 국내 그룹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키 큰 아이들을 뽑아서 남자 춤을 가르친 것이다. 이런 여성들의 무대 퍼포먼스를 보면 당연하게 빨려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 보다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반향이 더 컸다. 특히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막 사회주의를 마치고 자본주의로 들어선 국가들에서 폭발력이 엄청났다. 우리나라는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을 좋아한 반면, 이런 폐쇄적인 국가에서는 이제까지 이런 섹시한 여성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베이비복스가 2000년대 초반 아시아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케이팝의 1세대 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베이비복스가 아시아 전체에서 한창 인기를 끌었음에도 사실 비즈니스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류 1세대팀들이 고생한 이유는 사실 수익이 날 수 없는 구조였다. 우리는 시장을 개척하고 확장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장 확대 단계에서는 그저 한류의 맛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HOT나 안재욱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저 외국인 아티스트일 뿐이었다. 차트에서 높은 순위는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한다. 로컬에서 현지인과 스킨쉽이 가능할 때만이 수익이 나는 것이 문화 비즈니스의 현실이다."

-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일단 리스크는 개척자가 모두 떠안아야 한다. 현지에서 무대 공연을 갖기 위해서는 수많은 네트워크에 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과실이 반드시 개척자에게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죠. 그래서 제 후배들은 '선배는 돈만 날리고 사기만 당한다'고 뭐라고 합디다. 사실 돈이나 평가를 바라고 했다기 보다는 그저 좋아서 했다. 저는 제가 키운 아이들을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연습생 아이들에게 '너네 가슴에 태극기가 달렸다'고 말합니다. 그 정도 사명감 없으면 해외 나가서 활동하기 힘들어요."

-최근 케이팝 붐이 일면서 한국 대중가요에 대한 시각이 확 바뀌었다.

"그렇다. 놀라울 정도로 환경이 바뀌었다. 우리 10대 소비자들도 패스트푸드 먹고 자랐고 온라인 환경을 통해 레이디가가의 신보를 시차 없이 바로 듣는 아이들이다. 이런 환경에서 경쟁하는 케이팝의 내공 역시 강해졌다. 사실 SM엔터테인먼트나 YG엔터테인먼트의 수준은 거의 미국 팝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유럽아이들이 케이팝에 열광하는 이유 역시 이미 케이팝이 월드팝으로 등극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음악의 지위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선 것이다."

■"케이팝 전성기 맞았지만 자만감에 빠졌다"

세계 음악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걸그룹 <라니아>.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한계도 느낄 텐데…

"물론이다. 마이클 잭슨 프로듀서를 했던 테디 라일리와 함께 국내 방송사 가요프로그램을 함께 관람한 적이 있다. 그 친구에게 느낀 점을 물어보니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촌평하더라. 이것은 누구나 동감하는 바인데 너무나 엇비슷한 걸그룹들이 부르는 천편일률적인 노래들이 판을 치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이들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은 똑같은 걸 그룹을 내서는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팝의 위기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사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우리에게는 제이팝이라는 교훈이 존재한다. 한 때 아시아 1등 전 세계2등이었던 제이팝은 현재 국제화에 실패하고 그저 일본 내수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아무로 나미에로 전 아시아를 휩쓸곤 했지만 그저 성공에 안주하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도 케이팝이 자가 복제와 자기 최면에 빠져있다. 한국에서 성공하면 아시아에서 무조건 성공한다는 과도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일종의 부자놀이에 빠진 것인데…자기 최면에 빠지게 되는 것이 바로 반 한류의 시작점이 된다. 문화수출을 오랫동안 해본 입장에서는 절대 그런 신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수출이라는 것은 절대 겸손해야만 한다."

-최근에 태국 캄보디아와 라오스 같은 오지에서도 케이팝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 곳을 처음 개척했던 윤 대표의 초기 개척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얼마 전 MBC가 태국에서 케이팝 무대를 갖기도 했는데 감회가 특별했을 것 같다.

"정말 울컥했다. 태국에 처음 진출한 것이 2002년 시점이다. 배낭하나 달랑 메고 태국 그래미 사로 쳐들어갔는데,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48층 빌딩에 300여 아티스트를 보유한 거대한 미디어 그룹이었다. 시장 자체가 한국 보다 체계적인 시장이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태국 시장만 해도 한국의 저력을 알지 못하고 조금은 무시하던 시점이었을 정도다. 그런 시장에 베이비복스가 처음으로 1호 CD를 내고 첫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태국 활동 초기 에피소드가 있는가?

"물론이다. 당시 한국과 전혀 무관한 태국 시장과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전 참전 용사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우리는 잘 모르는 사실인데 한국전에 1만5000명이 참전해 파병규모 8위를 기록한 역사 깊은 우방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가 수십 년인데 아직도 그 노병들이 병실에서 고통을 겪고 있더라. 그래서 베이비복스를 데리고 함께 위로방문을 했다. 노병들은 물론이고 태국 장성들도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더라.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한 노병이 '자신은 한국전에서 다리를 잃어 너무 후회했지만 이렇게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한을 풀었다'고 까지 얘기 하더라. 이런 일이 태국에 보도되면서 우리를 보는 시선이 싹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세심함이 바로 문화수출이라고 생각해왔다."

■"문화수출이란 돈만 벌어 와서는 오래 못간다"


-문화수출이라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군요.

"대단히 민감하고 정치적인 이슈입니다. 한국 가수들이 중국 진출해 인기를 끌자 중국 공산당 고위 관료들이 외국가수를 따라 괴성을 지르고 머리모양 따라하니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걱정했을 정도에요. 당연히 중국에서 한류를 잠재우기 위한 전략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이런 반 한류 전략에 대해서 대책회의를 매주 개최했을 정도에요. 문화 수출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세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걸그룹 <라니아>의 태국인 멤버 '조이(JOY)'. 스포츠동아 김종원기자 won@donga.com


-대략 10년 전에 세웠던 비전이 현실화 됐는데…라니아도 그런 관점에서 만든 건가?

"라니아는 최초의 아시아 그룹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5개 국어가 가능한 멤버로 선발했고 조이(JOY)라는 멤버는 태국에서 직접 선발해 왔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아시아 팬들에게 그들의 멤버를 함께 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현지에 뿌리내려서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음악도 한국적인 방식을 버리고 완벽하게 미국팝 스타일로 갔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음악을 하냐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글로벌 뮤직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음반이 나오자 유통3사 모두 '어색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더라. 그런데 이제는 많은 이들이 라니아를 이해해 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음악성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걸그룹이 된 것이다. 몇 천 명의 팬클럽이 생겨났을 정도다.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빠르게 안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류는 어느 정도나 지속될까? 계속 전선을 확대해 나갈 전략인가?

"자만하지만 않는다면 한류는 오랫동안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모든 기획자들이나 가수들이 죽기 살기로 해외로 진출하는 상황이다. 우리의 노력을 압도할만한 경쟁자는 아직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문화를 수출한다는 자긍심과 긍지가 있다. 나는 케이팝의 확대가 일종의 '팔자'라고 믿는다. 확대할 수 있을 때까지는 끝없이 확장해 나가고 싶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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