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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여행]역사의 길, 사람의 길

hallyuforum | 2014.10.08 22:14 | 조회 426
조회 : 519  

출처옛몸새꽃 -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 발전 | 느티나무

원문http://cafe.naver.com/beobgochangsin/2805

[여행]역사의 길, 사람의 길

사람살이가 길을 낸다. 그 길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역사가 다시 길을 낸다. 그 길을 따라 사람살이가 이어진다. 인물이거나 범부거나 무릇 길을 가는 것은 같건만, 그 길 중에 특히 역사를 품은 길들이 있다.
어느 때 어느 사람이 어떤 이유 때문에 걸었던 그 길은 역사 속에 남아 후인들에게 길을 이른다. 그 길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사람은 어차피 제 각기의 굽이에서 길을 만나고, 그 길에서 길을 찾는다. 역사가 아니더라도 가야 할 길은 있는 법이다. 지령 900호의 굽이에서 역사의 길을 돌아보고, 사람의 길을 묻는다.

남사마을 돌담길

이순신 백의종군길- 남은 12척의 배
하동읍성 - 문암정 - 손경례가 - 진배미 - 남사마을

1597년에 이순신(1545~1598)은 참담하였다. 전세는 교착된 가운데 음력 2월 25일 삼도수군통제사 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3월 4일 투옥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겨우 사형을 면하고, 4월 1일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아산 본가에 잠시 들렀다가 꿈에도 생각 못한 비보를 듣게 된다.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던 어머니가 아들이 옥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올라오던 길에 배 위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마주하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 <난중일기> 정유년(1597) 4월 13일

그러나 순신은 백의종군의 몸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상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남행길을 서둘러야 했다. 천안, 공주, 논산, 익산, 삼례, 임실, 남원, 구례, 순천, 하동, 산청을 거쳐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 초계에 당도한 날이 6월 4일, 한성을 출발한 날이 4월 3일이었으니 꼬박 두 달에 걸친 고단한 여정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순신의 몸과 마음은 모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일찍 아침을 먹었는데 감정을 스스로 억제치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저녁에 홀로 빈방에 앉아 있노라니 많은 생각이 끓어올라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거리기만 했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7월 10일

7월 16일, 원균의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가 뚫리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군세를 정비토록 했으나 그때 남은 것은 군사 120명에 함선 12척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병력으로는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지만 순신은 비장한 각오로 장계를 올린다.
청령포 관음송

신에게는 아직 남은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이순신의 백의종군길 중 하동, 산청을 거쳐 합천에 이르는 길은 마지막 구간에 해당한다. 6월 1일 아침 일찍 하동읍성을 출발한 순신은 청수역에서 잠시 말을 쉬게 한 뒤 다시 길을 재촉해 해질 무렵 산청의 남사마을에 도착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길에 이틀 동안 묵었던 하동읍성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 최근 성벽 복원공사와 탐방로 개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동읍성이 있는 양경산(해발 194m) 정상에 오르면 하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덕천강변의 문암정은 강 건너 진주 원계마을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정자다. 원계마을에는 순신이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머물렀던 손경례의 집이 있다. 손경례의 집은 이순신 백의종군 유적지 가운데 가장 기억될 만한 역사의 현장이다. 8월 3일 선조로부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까이 진배미는 이순신이 군사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남사예담촌’으로 불리는 남사마을은 돌담길이 아름다운 전통마을이다. 사양정사와 이순신이 하룻밤을 묵었던 이사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단종 유배길 - 고운 님 여의옵고
싸리치 - 군등치 - 배일치 - 소나기재 - 청령포 - 관풍헌 - 장릉


1457년 6월 22일, 단종(1441~1457)은 살곶이다리를 건너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머나먼 유배길에 오른다. 남한강 물길을 거슬러 배가 닿은 곳은 이포나루. 여주의 어수정에서 잠시 목을 축인 단종은 여기서부터 뭍길로 영월 땅을 향한다. 원주 싸리치를 넘어 청령포에 이르는 길은 고개마다 단종의 피눈물이 스민다.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단종이 올랐다 하여 군등치(君登峙), 슬픔으로 서산에 지는 해를 향해 절을 한 배일치(拜日峙)며, 마침내 참았던 눈물처럼 소나기가 흩뿌리는 소나기재를 넘는다.

소나기재 마루에서 바위가 갈라진 선돌 사이로 바라보는 서강 물은 참으로 무심하다. 그 물은 청령포의 발치를 적신 후 이내 동강 물과 만나 남한강이 되어 흐른다. 남한강 물은 다시 북한강 물과 만나 한강으로 흐른다. 하지만 시간은 물길처럼 되돌릴 길이 없어 끝내 유배의 포구에 다다르고야 만다.

용주사
3면이 강물로 둘러싸이고 남은 한 면마저 험한 절벽으로 막힌 청령포는 오롯이 유배를 위해서 태어난 땅이다. 나어린 단종은 그나마 해질 무렵 서쪽 낭떠러지에 올라 아득한 한양 땅을 그리워했다는 것이니, 이른바 ‘노산대’다. 솔숲 사이에 우뚝한 ‘관음송(觀音松)’은 또 어떤가. 이 땅에서 가장 키가 크다는 이 소나무는 단종의 슬픈 사연을 보고 들었으니 관음송이다.

그러나 단종은 청령포에서마저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 해 여름 홍수가 나자 읍내 동헌인 관풍헌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했으나 금성대군에 의한 복위사건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며, 끊임없이 자살을 강요당하다 그 해 10월 24일 마침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야 만다.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피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어찌하여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밝은고

단종이 관풍헌에 머무는 동안 지었다는 ‘자규시(子規詩)’는 절절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 이름 붙여진 자규루는 공연히 소슬하다. 단종은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졌다. 뒤이어 그를 모시던 시녀들이 강물로 뛰어드니 동강 물은 잠시 잠깐 낙화유수가 된다. 그때의 일을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전한다.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 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 위에 떠 있었다.

세조의 명을 받아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왔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어명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 앉아 긴 울음을 운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렇게 왕이되 왕이 아닌 단종은 죽음의 길을 갔고, 왕이 아니되 왕인 방연은 삶의 길로 돌아왔다. 후환을 두려워한 탓에 거두는 이 없이 떠돌던 단종의 주검은 한밤중 영월 호장 엄홍도에 의해 몰래 옮겨져 산기슭에 묻혔다. 그 무덤이 바로 장릉이다. 그리고 또 한밤중에 망주석을 빠져나온 단종의 혼은 동강 어라연으로 가 신선이 되려다 그곳 물고기들의 만류로 태백산으로 가 산신령이 되었다. 아니, 되었다고 전한다. 그 전설은 이제껏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염원으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사람은 산 자보다 죽은 자의 영을 더 믿는 모양이다.

정조 화성행차길- 새로운 조선에의 꿈
지지대 - 화성행궁 - 수원화성 - 용주사 - 융건릉

장릉

1795년 윤2월 9일부터 윤2월 16일까지 8일 동안 이루어진 정조(1752~1800)의 화성행차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게 치러진 행사로 새로운 조선에의 꿈을 담고 있는 장엄한 행진이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통해 자신의 효심을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개혁정치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한껏 펼쳐보였다. 비록 급작스런 죽음과 함께 그 꿈은 꿈으로 머물고 말았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극적인 행행으로 남아 아직 사라지지 않은 꿈들을 불러일으킨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이장하고 원찰로 용주사를 정한 후 정조는 거의 해마다 아버지의 능이 있는 화성으로 능행차길에 나섰다. 그 시기는 1월 혹은 2월로 농사철을 피해 이루어졌다. 정조는 자신의 행차를 통해 민간에게 효행을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행차 중 많은 민원을 처리함으로써 백성과 함께하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두었다. 거기에 많은 인원이 이동함에 따른 도로와 다리의 건설·보수로 치도를 겸하고, 대규모 병력을 데리고 가면서 수도방위체계를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더욱이 1795년의 행차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는 나들이이기도 했고, 한창 건설 중인 화성을 둘러보고 독려하는 의미도 있었다.

첫째날 새벽 일찍 창덕궁을 나선 행차는 숭례문을 거쳐 노량진으로 이어지며 장엄의 극치를 이루었다. 화성행차를 그림으로 기록한 <반차도>에 의하면 이날 어가를 따라간 인원만도 1779명에 달하고, 중도에 합류하거나 현지에 미리 가있는 인원까지 합하면 실제 동원 인원은 6000여명에 이른다. 노량진에서 행차는 배다리(舟橋)를 건넌다. 지금 한강대교가 놓인 노들강변에 오방색 깃발이 나부끼는 배다리가 걸려 있고, 그 위로 1700여명의 인원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강을 건너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한강을 건넌 행차는 시흥행궁을 향해 거기서 첫날밤을 보낸다.

화성 행궁
둘째날 봄비 속에 화성행궁에 도착한 행차는 화성에서의 본격적인 행사를 준비한다. 셋째날은 화성향교 대성전에 참배하고 문무과 별시를 시행한다. 넷째날은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후에 어머니를 합장하여 융릉)에 전배하고, 오후에는 화성에서 두 차례 군사훈련을 치른다. 그리고 다섯째날인 윤2월 13일 이번 행차의 주 행사인 진찬례, 즉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벌어진다. 여섯째날은 백성들을 위한 위무행사를 갖는다. 신풍루에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낙남헌에서 노인들을 위한 잔치도 베푼다. 양로연을 마지막으로 화성에서의 주요 행사를 마친 정조는 자신이 설계한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일원을 돌며 감회를 새로이 한다. 일곱째날 화성을 떠난 행차는 내려온 길을 거슬러 귀경길에 오른다. 여덟째날 서울에 이르기 전 정조는 백성들을 가마 앞으로 불러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정조는 화성행차를 준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백성들에게 민폐가 없도록 지시한다. 행차에 따른 경비도 국민의 세금과는 관계없이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수입으로 마련했다. 더욱이 쓰고 남는 돈조차 백성과 나라를 위해 쓰도록 했다. 개혁을 꿈꾸면서도 백성의 살림에 소홀함이 없었던 정조의 애민정신은 화성 건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그의 애민의 마음은 절절하기만 하다.
수원화성

성벽을 쌓는 일로 말하자면 올해 쌓아도 될 일이고 내년에 쌓아도 될 일이고 10년을 걸려서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서도 안 되고 이틀을 굶겨서도 안 될 것이며 한 달을 참고 지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지가 내일이라 추위가 심하다. 일하는 자들을 생각하니 저들의 추위가 나의 추위다. 솜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일일이 물어서 연유를 보고하라. 석수들에게 옷감과 모자를 보내 주겠다. -‘화성성역의궤’에서

정조는 어디로 갔는가. 새로운 조선에의 꿈은 어디로 갔는가.

글·사진ㅣ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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